박혜은, 평론, 2011

캐스퍼 강은 1981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났다. 그는 칼튼 대학에서 건축학 학부(B.A.S.)를 마친 뒤, 2004년 대한민국 서울로 이주하여 약 2년간 건축회사에서 일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가져왔던 예술에 대한 애착을 따라 직장을 그만 둔 후 작업에 몰두했다. 현대 사회의 현상에서 영감을 얻은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시각적 형태와 대상물은 팝 문화와 물질주의, 그리고 문화 정체성과 자본주의로부터 찾아지고 있다. 캐스퍼강은 현재 서울에 거주하며 작업하고 있다.

한국 화폐 속에 드러난 퇴계 이황과 세종대왕, 민화 속 전통 이미지, 한국의 대표 건축물인 고성들, 캐스퍼강이 천작하는 소재들의 열거다. 서양의 교육을 받고 그 문화에서 자랐지만 외적인 모습은 동양인인 교포들이 모국에 와 가장 큰 혼란을 겪는 부분일 것이다. 이런 갈등은 작업의 주요한 소재로 쓰이곤 한다. 캐스퍼강 역시 교포들이 갖는 카오스적인 상황, 그 상황과 마주하며 겪게 되는 혼란과 감정을 작품의 소재로 쓰고 있다. 하지만 작품의 내러티브를 넘어서 주목할 것은 그가 표현하는 방식이다. 도식화된 패턴과 자유롭게 넘나드는 선이 만들어내는 공간의 재배치식의 표현방식이 흥미롭다. 낯선 이방인의 관점에서 보여지는 수원 화성, 민화, 탈 등 한국적 일상을 차용하여 하나의 도상으로 이미지화시켜 캔버스에 배치한다. 동일한 도상을 반복적으로 쓰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사용되기 시작한 실크스크린 기법을 작가 역시 사용하고 있지만 이것은 캐스퍼강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한 아주 사소한 방편에 불과할 뿐이다. 실크스크린으로 세밀한 선을 표현한 뒤 그 여백을 세필로 하나하나 메워간다. 성벽을 쌓은 돌 하나를 칠할 때도 적어도 20회 이상을 칠한다. 그 후 다시 실크스크린으로 캔버스에 표현된 선들을 덧입혀준다. 화면은 붓 자국 하나 남지 않을 정도로 맑고 깨끗하다. 이 점이 여타의 실크스크린 기법과 차별화된 점이며 캐스퍼강의 고집스런 완벽주의를 보여준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딱히 뭐라 명명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의 관심은 오직 미술의 무상함과 엔트로피이다. 작품 SECLUSIONBANISHMENT에서는 ‘수원 화성’이라는 공간을 모티브로, 현실과 가상을 넘나든다. 그는 ‘수원 화성’을 대면했을 때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시각적 이미지들, 예를 들면 무한한 패턴으로 이뤄진 높은 성벽, 아스라한 현기증을 일으키는 끝없이 이어진 성곽들만이 각인이 된 것이다. 수원화성이 지니고 있는 한국적 문화와 컨텍스트, 미학적 요소, 또는 재료나 기능이 지니고 있는 장점은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실재하고 있는 ‘수원 화성’에 호기심 가득한 어린아이의 달콤한 상상력을 결합하여 허상의 이야기를 부여 하는 작업이야말로 캐스퍼강이 말하는 미술의 허상함을 꼬집는 것이다.